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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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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1-43 / 찬송가 544

요절 5:34a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 그를 구원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죽은 딸을 살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인생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인생문제를 치료받고 영혼의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21-23a.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에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고쳐 주신 후에 다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 모여들었는데,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때에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당시 회당에는 세 명의 회당장이 있었는데 야이로는 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설교자를 초청하고 회당의 예배 순서를 감독하는 등 회당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야이로가 왜 회당장으로서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까? 23b.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야이로 가정에 12살 먹은 외동딸이 있었습니다.(42, 8:42). 이 딸은 야이로의 집에 피어난 한 송이의 꽃이요, 야이로 부부의 기쁨이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딸이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이로 가정에 큰 고통이요 슬픔이었습니다.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소문난 의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특효약이라는 비방을 구해서 먹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의 병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신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야이로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급히 예수님에게로 달려가서 발아래 엎드려 딸을 구해 달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이 회당에서 한 편 손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애타는 마음을 영접하시고 그의 집으로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딸을 고쳐주겠다는 약속과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밀면서 따라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간구하는 인생들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어떤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만났습니까?. 25-26.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던 차에 혈루증이란 여인들에게 있는 병으로 유출병이라고도 하는데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병입니다. 오늘날에는 지혈제 등 약을 투여하거나 심하면 자궁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여 치료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율법에 유출병이 있는 자는 부정하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15:1-15) 유출병이 있는 자가 만진 물건은 부정하게 되고, 또 누구든지 부정한 자와 접촉하게 되면 저녁까지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동침한 남편도 일주일이나 부정하게 됩니다(15:24). 부정한 자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되고 성전이나 회당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는 정상적인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여자는 그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병을 고쳐 보려고 유명한 의사를 찾아다녔으나 재산만 허비하고 병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자포자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가 어떤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까?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혈루증 앓는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자기보다 훨씬 더 부정한 문둥병자를 만지시며 깨끗하게 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는지 모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겠다는 소망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야이로와 같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 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수치스러운 병을 고쳐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무리들 속에 끼어서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로 작정했습니다. 여자가 12년 동안이나 혈류증을 앓으며 병약해진 몸으로 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필사적으로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이처럼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옷자락을 만지게 된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이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손을 대다는 동사는 닿는다는 의미도 있는 동시에 불을 켠다(8:16)”, “붙들어 맨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단순히 손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붙들어 매는 믿음으로 손을 댔습니다. 병을 고침 받으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의 믿음은 한마디로 필사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혈루증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9. 이에 그의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에 혈루증이 치료되었습니다. 12년 동안이나 이 여자를 고통스럽게 해 온 혈루증이 깨끗이 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했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에게만 예수님의 크신 능력이 나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몸을 껴안고 매달린다고 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 여자와 같이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덧입고 고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여자가 병 고침을 받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30-33.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예수님께서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써 고침을 받은 것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리를 돌아보며 옷에 손을 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데 손 댄 사람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하여 두리번거리며 자기 옷을 만진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이때 사람들 뒤에 숨어 있던 여자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여자는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길을 피할 수가 없음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자기를 찾으시는 것을 보고 심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부정한 자로서 예수님을 옷을 만진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요, 허락도 없이 예수님의 능력을 훔쳐서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음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진실하게 자기를 고백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이야기,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으나 재산만 허비하고 병이 심해진 이야기 등 12년 동안의 고통과 슬픔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인생문제를 다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나오게 된 동기와 은밀히 옷자락을 만져 병이 낫게 된 일을 다 고백했습니다.

 

     여자의 고백을 다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혈루증 앓던 여자를 사랑스러운 딸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며 그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는 곧 그의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자는 병고침을 받고자 하는 일념으로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계획을 세웠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래서 혈루증을 고침받기는 했으나 예수님 몰래 능력을 훔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마음에 참된 평안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여자는 육신은 건강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지 않고 거저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병고침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육신이 건강해도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좋은 환경에서 살면서도 두려움과 허무와 절망에 빠져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는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앓던 여자를 찾아내어 자기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그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의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전인격적인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자는 그 동안 수치심과 자의식으로 마음이 병들고 오그라들었지만 이제 모든 것을 고백함으로서 그 심령에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예수님께서 혈루증을 고침받은 여자를 기어코 찾아내어 모든 것을 고백하게 하신 것은 그를 온전히 구원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혈루증 앓던 여자의 병만 고쳐주기를 원하셨다면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써 병을 치료받고 몰래 가려고 할 때 그냥 두셨을 것입니다. 이미 병을 치료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음으로써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진정한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자가 예수님 뒤에 와서 몰래 옷을 만짐으로 병을 치료받은 것은 현실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잠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고 참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기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들을 때 예수님이 그의 예수님이 되고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예수님 앞에 나와서 고백하는 자들만이 예수님이 그의 예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 인간이 육신의 병과 같은 현실문제를 해결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혼이 구원받음으로써 마음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절박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며 참자유와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자기의 인생문제를 고백하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음으로써 예수님이 나의 예수님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함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문제를 치료받고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누구나 다 해결받아야 할 크고 작은 현실문제들이 있습니다. 건강문제, 가정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등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고 불행을 느끼게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같이 보이려고 태연한 척하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실수로 얻은 문제도 있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갖게 된 운명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볼 때 사람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고, 문제가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삶을 불행하고 하고 슬프게 하는 고통스럽게 하는 인생문제를 예수님 앞에 고백할 때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인생문제를 예수님께 고백하고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들을 때 예수님의 나의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것이요, 구원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인생소감을 발표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모든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을 때 영혼이 구원받고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께서 혈루증 앓는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외동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곧바로 회당장의 집을 향하여 출발했지만 혈루증 앓는 여자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때 야이로는 혈루증 앓는 여자가 원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여자의 간증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집 사람들은 딸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안수하여 주시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이 병자는 고칠 수 있지만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믿음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야이로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났으니 집으로 가서 장사지낼 준비를 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야이로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처음 가졌던 믿음이 흔들리는 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길이 없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서 죽게 된 딸을 살려 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믿음이 흔들리자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믿기만 하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just believe!" “only believe!" "just go on believing!"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딸의 상황이 어떻든지 계속해서 믿으라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에게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나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처음 가졌던 그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4:19-20).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사라의 죽은 태에서 이삭을 낳게 하셨으며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이러한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개인문제, 가정의 문제, 학문과 직장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들에게는 경북대 주님의 제자를 세우는 것과 대구 UBF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도할 때 속히 응답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기도하기 전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사단이 심어주는 두려움과 절망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까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까지 믿기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을 것이 없어서 절망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때가 바로 믿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11:1). 믿음이란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2:2a. 예수를 바라보자 이 말씀은 영어 성경에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그냥 한 번씩 힐긋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try again 할 때,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어떻게 살려 주셨습니까? 37-38.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그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는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곧바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의 집에서는 죽은 딸의 장례 준비로 분주하고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만 데리고 들어가신 것은 이들이 예수님의 신비로운 사역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39-41.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야이로의 집에는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집에 왔던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아이가 완전히 죽었는데 잔다고 하니 비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하며 비웃는 동네 사람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불신하는 자들과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부모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의 시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42-43.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죽었던 소녀가 벌덕 일어나서 걸어나왔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죽은 아이가 살아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동안 병으로 고생하며 먹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딸이 살아나자 온 집안을 덮고 있던 죽음의 권세가 사라지고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이로의 가정은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거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천국의 소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요, 생명을 살리시는 부활의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악령의 권세에 시달리던 인생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권세자이심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의 두려움의 근원이요 모든 불행의 뿌리입니다. 죽음은 가족을 갈라놓고 가정을 파괴하는 잔인한 원수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을 허무하게 하고 무의미하게 합니다. 오늘날 경제 발전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의 수명은 길어졌지만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에 눌려서 살고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할 때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이 없고 잠시 잠을 자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아침에 깬다는 것이 전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죽음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전재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을 자고 나면 희망찬 새아침이 오듯이 육신의 죽음 뒤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무덤 속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장차 부활의 주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신자들과 우리 신자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우리들을 다시 살리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심령들을 향해서 달리다큼, 일어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Campus 영혼들을 향해 불신 가족들을 향해 달리다꿈”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음성을 듣고 믿을 때 생명의 소생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죽은 심령들에게 예수님이 음성을 들여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혈루증 앓는 여자와 같은 필사적인 믿음, 회당장 야이로와 같은 변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지만 믿는 자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부활의 산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우리 인생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구원받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주위에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역사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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